1990년대 중반, 단숨에 무대를 압도한 얼굴이 있었다.
묘하게 이국적인 이목구비, 신비로운 분위기, 그리고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말투까지.
임상아는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모으는 사람이었다.
연기자로 먼저 얼굴을 알린 그녀는 1996년, 주영훈이 작곡한 데뷔곡 ‘뮤지컬’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다.
독특한 재즈풍 사운드와 안정적인 무대 매너로 데뷔와 동시에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뮤지컬’은 방송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히트곡 반열에 올랐다.
이어 박진영이 작곡한 정규 2집 ‘저 바다가 날 막겠어’도 연이어 좋은 반응을 얻으며 입지를 다졌다.
그 시절, 겨울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김현철과의 듀엣곡 ‘크리스마스 이브’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임상아표 명곡 중 하나다.
그러나 인기를 구가하던 임상아는 데뷔 3년 만에, 누구보다 화려했던 무대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모두가 말렸지만, 그녀는 뉴욕을 선택했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걸 해냈던 임상아.
드라마, 예능, 뮤지컬, 가요 무대를 오가며 쉼 없이 달렸던 그녀는 어느 순간, 삶이 무대 위에서만 흘러가는 듯한 공허함과 일의 노예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던 중 뉴욕 출장에서 뜻밖의 오디션 제의를 받았고, 망설임 끝에 모든 걸 내려놓고 뉴욕행을 결정했다.
단 두 개의 여행 가방만 들고 시작한, 전혀 새로운 인생이었다.
“무대에서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뉴욕에서는 아무도 나를 몰랐죠.
아시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디자인한 가방을 보지도 않고 ‘그래서 중국에서 만들었냐’고 말하던 그 눈빛이 아직도 기억나요.”
낯선 땅에서 외롭고 지친 시간도 있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영화를 공부했고, 요리 학교도 다녀봤지만 결국 임상아가 돌아간 곳은 ‘패션’이었다.
패션 명문 파슨스 디자인스쿨에서 마케팅과 디자인을 수료한 임상아는 2006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 SANG A를 론칭한다.
처음부터 순탄하진 않았다.
이색적인 소재를 활용한 고가의 핸드백을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이탈리아 장인들을 찾아다녔고, 한 땀 한 땀 기술자와 밤을 새우며 공장을 설득해 지금의 제품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탄생한 SANG A는 단숨에 할리우드 셀러브리티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비욘세, 리한나, 앤 해서웨이, 제시카 심슨까지.
뛰어난 패션 감각을 자랑하는 삼성가의 이서현도 상아백을 선택했다.
미국 상류층 0.1%를 타깃으로 한 이 브랜드는 어느새 뉴욕 패션계에서 주목받는 이름이 되었고, 현재 전 세계 20여 개국에 진출하며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으로 자리 잡았다.
2006년 핸드백을 시작으로, 2017년에는 주얼리까지 론칭하며 사업이 번창했다.
화려한 무대를 뒤로하고 선택한 새로운 삶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자신에게 솔직했고, 결국 자신만의 색깔로 다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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