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첫해부터 소송 휘말렸는데.. 소송만 20년 겪었다는 레전드 가수


‘문화 대통령’이라 불리는 서태지의 커리어는 음악뿐 아니라 법정에서도 화려하다.

데뷔 이후 20여 건이 넘는 크고 작은 소송에 휘말렸는데, 흥미로운 건 대부분이 피소(被訴)가 아닌 고소(告訴)였다는 점이다.

흔히 연예인들은 구설을 피하려 웬만한 법적 분쟁을 덮고 넘어가지만, 서태지는 달랐다. 자신의 권리와 원칙이 걸린 문제라면 정면 돌파를 택했다.

1992년 데뷔해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첫 소송을 시작했다.

일본 공연 실황 비디오가 무단으로 판매되자 곧바로 판매금지 가처분을 신청한 것이다.

저작권 개념조차 희미했던 시절, 방송 녹화 영상이 아무렇지 않게 대여·판매되던 관행에 제동을 건 사건이었다.

1994년에는 무단 브로마이드와 인형 제작에 맞서 초상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고, 훗날엔 자신을 캐릭터화한 티셔츠 판매 업체를 고소하며 퍼블리시티권(초상·이름의 상업적 권리)까지 적극 주장했다.

‘내 얼굴, 내 이름은 내가 통제한다’는 태도를 끝까지 견지한 셈이다.

하지만 그의 소송사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사건은 단연 2001년 ‘컴백홈 패러디 소송’이다.

패러디 가수 이재수가 원작자 동의 없이 ‘컴배콤’을 발표하자 서태지는 저작인격권 침해로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언론은 “문화대통령이 쪼잔하다”며 서태지를 몰아세웠고, 네티즌들 역시 ‘표현의 자유’ 논리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서태지는 풍자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단지 영리적 이용, 즉 패러디를 앨범으로 발매해 상업화한 것에 반대한 것이다.

법원은 동일성 유지권 침해를 인정했고, 결국 음반은 판매 금지됐다. 이 판례는 한국 음악계에 패러디와 리메이크 절차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전환점이었다.

이 사건은 서태지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음저협)와도 정면충돌하게 했다.

본인이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협회가 사후 승인을 내주며 패러디 음반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2003년 음저협을 탈퇴했고, 나아가 협회를 상대로 수억 원대 저작권료 반환 소송을 벌였다.

대법원까지 이어진 긴 싸움 끝에 일부 승소 판결을 얻어냈고, 이 과정에서 저작권 관리의 독점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법정 투쟁은 공적인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2011년엔 세간을 발칵 뒤집은 사건이 있었다. 바로 배우 이지아와의 이혼 소송. 두 사람이 2000년 미국에서 결혼해 3년간 부부로 살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대중을 충격에 빠뜨렸다.

위자료 및 재산분할 등 55억 원대 소송으로 번진 이 사건은 양측이 각자 수 명의 변호인을 세운 대형 법정전으로 치달았다.

결국 조정으로 일단락됐지만, 20년간 닫혀 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가 다시 봉인된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서태지의 소송사는 단순히 분쟁의 기록이 아니다.

저작권·초상권·퍼블리시티권 등, 한국 대중문화 법제도의 빈 구멍을 드러내고 메워온 과정이었다.

사전심의제도 폐지 국면에서도 그의 4집 ‘시대유감’은 도화선이 되었고, 패러디 소송은 ‘표현의 자유 vs 원작자 권리’라는 논쟁을 불러왔다.

이지아와의 사건은 ‘철저히 베일에 싸인 사생활’의 역설을 보여주기도 했다.

20년 넘는 법정 드라마 속에서도 분명한 건 하나다.

서태지는 “내 음악, 내 얼굴, 내 권리는 내가 지킨다”는 원칙을 단 한 번도 꺾지 않았다는 것.

그 끈질긴 원칙이 있었기에, 지금도 사람들은 그를 ‘문화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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