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에 돈 다 썼습니다..”50년간 인명구조 해서 2천명 살린 UDT 출신 배우의 고백


정동남에게 구조는 직업이 아니었다.

한 사람을 잃고 평생을 걸게 된, 아주 개인적인 이유였다. 1969년, 당시 스무 살이던 그는 16살 남동생의 익사 사고를 겪었다.

늘 수영을 배우라던 말이 무색하게, 동생은 어느 날 친구들과 한강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민간 구조대라는 개념은 없었다.

가족은 어렵게 돈을 구해 조각배를 탄 두 사람에게 시신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돈을 받은 뒤 삼지창으로 몇 분 만에 동생을 건졌고, 정동남은 그 장면을 잊지 못했다.

관도 없었다.

급히 구한 사과 상자로 관을 만들어야 했고, 크기를 맞추기 위해 돌로 나무 상자를 두드리던 장면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날 이후, 한 가지 다짐이 생겼다.

“물에 빠진 사람은 무조건 건져야 한다.”

그 결심 하나로 정동남은 50년 가까이 민간 구조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연예인이기도 하지만, 구조 활동만큼은 평생의 사명처럼 여겼다.

“돈은 벌었지만 한 푼도 안 썼어요. 구조에 다 썼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꺼내는 이유도 거기 있다.

‘서울뚝배기’로 이름을 알린 후 최고 몸값을 받던 시절에도 야간 업소 대신 구조 현장을 택했다.

자신이 만든 특수인명구조단은 순수 봉사로만 움직였고, 그 결과 지금까지 시신 수습 580여 구, 생존 구조는 2천 명을 넘겼다.

그런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 대통령 표창은 물론미국 연방교통안전국에서도 표창을 받았다.

하지만 언제나 “아내가 받아야 할 상”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늘 현장에 있었고, 가족의 짐은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정동남은 ‘인간 119’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구조 현장을 지켰다.

1993년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 아시아나 항공 733편 추락, 구포역 전복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한항공 괌 추락 사고,그리고 세월호 참사까지.

당시 해경보다 먼저 민간 잠수부들과 현장에 도착했고, 뱃머리에 남은 공기를 감지해 수색 방향을 제안하기도 했다.

정동남의 말은 단순한 직감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쌓아온 경험에서 나오는, 생명을 향한 본능적인 감지였다.

UDT(해군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이력도 있지만, 더 중요했던 건 그 어떤 사고에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는 마음이었다.

천안함, 태안 해병대 캠프 고교생 사고, 대구 지하철 참사…구조 현장에만 서면 나이는 무색해졌다.

“목숨은 살리지 못했지만, 그날의 후회로 시작된 일이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오늘도, 누군가의 생명을 건져내는 데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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