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영화 유정으로 데뷔한 남정임은 단숨에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2300명의 경쟁자를 뚫고 타이틀롤을 맡으며 영화 한 편으로 한국 영화계의 판도를 바꿨다.
청순하고도 생기 넘치는 외모, 신선한 마스크, 당시로는 드물게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던 학력까지, 그녀의 등장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윤정희, 문희와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리며 전성기를 달리던 그녀는, 데뷔 5년 만에 300편에 가까운 영화에 출연하며 만능 배우의 이미지를 굳혔다.
하지만 인기 절정이던 1971년, 그녀는 재일교포 사업가와의 결혼을 발표하며 영화계를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약혼도 결혼도 모두 비공개로 이뤄졌고, 기자회견 자리에서 그녀는 “외국으로 떠나면 다시 영화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팬들의 충격은 컸다. 여전히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 배우였기에, ‘돈 많은 집에 시집간다’는 시선도 따랐다.
하지만 결혼 이후의 삶은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결혼 후 일본으로 건너간 남정임은 시댁에서 식당일을 도우며 지냈다.
그녀를 우연히 만난 감독 정진우는 “남정임이 시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으며 고된 일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결국 결혼 5년 만에 이혼했고, 1976년 영화 나는 고백한다를 통해 조용히 복귀를 시도한다.
하지만 반응은 차가웠고, TV 드라마에서도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다. 명성보다 불행이 먼저 조명되는 시기였다.
그 시기, 자해 소동과 음독 시도 등 불안정한 삶을 보였고, 언론에 오르내리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그런 혼란의 시간 속에서도 다시 사랑이 찾아왔다. 노승주 씨와 재혼해 아이를 낳고, 오랜만에 평온한 일상을 누리기 시작했다.
배우가 아닌 엄마이자 아내로서의 삶. 그렇게 조용히 무대 뒤로 물러났다.
행복이 찾아온 것도 잠시.
1989년, 유방암 진단을 받은 남정임은 기도원과 병원을 오가며 긴 투병을 이어갔다. 결국 1992년, 마흔일곱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작품을 남기고, 가장 찬란했던 시절에 떠난 이름.
지금도 그녀를 떠올리며 “내 소년시절의 로망이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만큼, 남정임은 그 시대의 기억이자 사랑이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녀를 그리워한다
단순한 미인도, 단지 인기 있는 배우도 아니었다.
남정임은 한국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중심이었고, 짧지만 강렬한 생애로 대중의 마음 한켠을 채운 인물이었다.
떠난 자리에는 오랫동안 공백이 남았고, 그 공백은 아직도 누구로도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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